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쑹자오런 암살 사건 (문단 편집) == 배경 == 쑨원과 위안스카이는 임시정부를 난징에 둘 것, 위안스카이가 난징에서 대총통에 취임할 것, 임시 참의원이 정하는 임시 약법을 준수할 것이라는 조건에 대해 합의했다. 1912년 2월 15일 임시 참의원은 위안스카이를 임시대총통에 선출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난징에서 취임하는 것을 거부하고 3월 10일 베이징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위안스카이는 [[탕사오이]]를 국무총리에 임명하고 그 자신이 동맹회원이기도 한 탕사오이는 <동맹회내각>이라 불리는 동맹회 내각을 조직, 교육총장에 [[차이위안페이]], 공상총장에 [[천치메이]], 농림총장에 [[쑹자오런]] 등을 임명했다. 1912년 3월 11일 임시 참의원이 쑹자오런의 주도로 1911년 12월 발표한 임시정부조직대강을 수정하여 임시 약법을 발표했다. 임시 약법에 따라 위안스카이는 약법 시행 10개월 안에 국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정식 대총통을 선출해야 했다. 탕사오이는 차관 문제로 동맹회, 공화당, 통일당의 공격을 받아 6월 15일 금방 사퇴했고 외교총장 [[루정샹]]이 새로 총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루정샹 역시 내각 조각 문제로 곧 사퇴하여서 내무총장 [[자오빙쥔]]이 국무총리를 겸하게 되었고 농림총장에 진진선, 사법총장에 허세영, 공상총장에 유규일, 교통총장에 주계금, 재정총장에 주학희, 외교총장에 왕여호를 임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위안스카이가 동맹회에 우호적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이들은 국민당이 창당되자 모두 국민당 가입을 선언했다. 육군총장 [[돤치루이]]와 해군총장 유관웅은 군인이기 때문에 정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1912년 8월 10일 임시 참의원이 중화민국 국회조직법을 통과시켰고 8월 13일 중의원 선거법, 선거구역표가 공포되었다. 9월 5일에 1912년 12월 10일에 초선을, 1913년 1월 10일에 복선을 실시하겠다고 공포했다. 1912년 8월 비밀 조직이었던 중국 동맹회는 공개정당으로 거듭나 통일 공화당 등 여러 소수 정당을 흡수, 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국민당의 지도자는 쑨원이었으나 실질적인 수반은 쑹자오런이었다. 선거 결과 국민당이 중의원 596석 중 269석을, [[리위안훙]]의 공화당이 121석을, 통일당이 18석을, 량치차오의 민주당이 16석을 차지했고 참의원 중 국민당이 123석을, 공화당이 55석을, 통일당이 6석을, 민주당이 8석을 차지하는 등 국민당이 압승했다. 이중에 이중 당적을 가진 사람이 상당하긴 하였고 국민당 내부는 상우회, 정우회, 집익사, 계축동지회 등으로 분열되는 등의 양상이 있긴 하였으나 1912년 4월 8일 국회 개막 이후 참의원 의장에 국민당원 [[장쥐]], 부의장에 국민당원 [[왕정팅]]이 당선되는 등 국민당의 위세는 대단했다. 선거 대승 이후 국민당의 실질적인 책임자 쑹자오런은 다음 총리가 될 것이 확실해보이는 인물로, 내각책임제, 지방자치제, 헌법 제정 등을 주장하며 전국각지에서 유세를 돌고 위안스카이의 독재와 무능을 통렬히 비판했다. 이 때문에 위안스카이와 국무총리 자오빙쥔은 쑹자오런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